‘자존(自尊)’의 길, ‘자비(自婢)’의 길 part 1

  • 이병권의 매국우파론 4부 : : 뉴라이트의 허망한 전쟁 시나리오 분석 part 1

자존심(自尊心)이 타인과의 경쟁 관계에서 원했던 것을 얻는 긍정적 마음이라면, 자존감(自尊感)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감정의 의미로 쓰입니다. 이 자존감이란, 인간 심리의 영역에 있어서 1890년대부터 유럽 심리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고 합니다. 영어로 자존감은 ‘self-esteem’, 자존심은 ‘self-respect’ 또는 pride로 표기됩니다. 자존감과 자존심 모두 인간의 심리적 영역이지만, 양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자존감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즉각적인 감정 반응이지만, 자존심은 자신(자아)에 대해 작게는 체계적인 자기 인식, 좀 더 크게는 나름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만의 자존심을 세우기는 쉽지만, 자존감을 가지려면, 상당히 축적된 경험과 역사적 맥락이 필요합니다.

자존감은 무엇보다 주체적 자기 인식을 전제로 합니다. 여기서 주체적 인식이란 독립적 사고를, 주체적인 자기 인식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자존(自尊)의 실체는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 단군(檀君)에서 비롯된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같은 역사서에 기록된 기원전 2333년 천손인 단군이 신단수에 내려와 독자적인 조선(朝鮮)이라는 국가를 건립했으며,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정신으로 세상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 역사적 실체가 분명하게 전하지는 않지만, 우리 민족의 정신 안에 이 단군과 단군의 자손이라는 의미는 그 깊은 통치원리와 함께 우리 문화, 생활 곳곳에 자존감의 중심에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한 이유로 일제 강점기에 박은식 선생은 물론, 김상헌. 이회영, 이상룡, 신채호 등 독립지사들은 하나 같이 고대사를 연구한 역사가이자 독립투사였습니다. 민족정기와 민족정체성을 회복할 첫 실마리로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일제는 지속적인 식민지 수탈제제를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우리 한국인의 자존감의 원천을 없애야 했습니다. 한국인의 자존(自尊)을 대신할, 스스로를 비하하는 자비(自婢)의 역사관을 깊숙이 심고자 했습니다. 1925년 설립된 <조선사편수회>는 한국인 이병도, 신석호를 앞세워 조선 역사를 왜곡, 비하합니다. 문제는 이 시절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식민역사학이 이병도와 신석호의 제자들이 장악한 한국 역사학계에서 청산되기는커녕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는 와중에, <뉴라이트(매국우파)> 세력이 추가되어 세력을 불리더니, 이제는 정권까지 장악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세력은 독립기념관은 물론,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등 대표적인 역사기관장들을 뉴라이트 인사들로 채웠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자존(自尊)’의 한국사를 지우고 ‘자비(自婢)’의 노예 역사관을 총독부 시절처럼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존의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은 사대주의를 경계하고,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모색했으며, 실용적 외교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자비의 길에 섰던 자들은 한결같이 사대주의의 길에서 개인이나 당파의 이해에 앞장섰고, 실용보다는 이념을 강요했다는 점입니다. 조선 숙종 시절 개혁사상가 윤휴(尹鑴)가 그랬습니다. 그는 개혁과 국가의 이익을 고민했고, 성리학을 유연하고 실용적으로 해석하려 했습니다. 또한 경제개혁을 통해 국민 복리 증대를 추구했습니다. 이 윤휴는 비운에 갔습니다. 그의 정신과 그가 선택한 자존의 길을 뒤 돌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뉴라이트(매국우파)>가 선택한 자비(自婢)의 길이 얼마나 허망한 이념의 틀에 갇혀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윤휴(尹鑴)가 선택한 길과 송시열(宋時烈)이 선택한 길

윤휴(尹鑴,1617~16980)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작은 공통점과 큰 차이점을 드러낸 인물이자 절친한 서인(西人)이었습니다. 비록 나이로는 송시열이 10살 위였지만, 병자호란 이후(1637) 송시열은 윤휴가 머물렀던 속리산 인근에서 만나 긴 토론을 한 후, 자신의 오랜 공부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달았다고 토로했을 만큼 윤휴는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청 태종의 무도한 침공과 인조의 굴욕에 비분강개하며 함께 나라를 바로 세우고 북벌에 나설 것을 맨체→다짐했지만, 두 사람의 행보는 정반대였습니다. 윤휴는 자존과 개혁의 길을, 송시열은 오로지 주자를 이념화하고 권력의 획득에 골몰한 노론 수장의 길을 걷게 됩니다.

 

첫째, 북벌에 진심인 자, 정치적 거래 물로 본 자.

윤휴는 현종과 숙종 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북벌(北伐)을 주장했고, 필생의 과업으로 생각했습니다. 특히 중국 내에 잦은 지방 호족들의 반란(삼번의 난 등)이 일어나자, 이를 기회로 삼아 주변 소수민족의 적극적인 호응을 끌어낸다면, 효종 시절부터 절치부심 키워온 강군 10만으로 중국의 심양까지도 너끈히 도모해 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승리할 수 있는 전쟁을 위해 호포제를 도입한 조세개혁으로 민생을 키우고, 총포류를 정비/개량하며, 일종의 전차라고 할 수 있는 병거(兵車)를 제작하는 등의 실질적인 전력 강화에 주력했습니다. 반면, 송시열은 효종 시절 앞에서는 북벌에 호응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뒤로는 정작 전쟁 준비에 필요한 사회경제적 개혁과 제도 정비에 반대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북벌의 발목을 잡고 정치적 거래를 통해 서인 세력의 확대에 골몰합니다. 조정 회의에서 밀리면, 유생들을 동원해 반대 집회나 집단 상소를 통해 실질적으로 개혁과 북벌에 반대하는 노회한 정객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숙종 6년에 이르러, 중국 내 반란이 잦아들게 되자 송시열은 북벌을 시대착오적 허세로 몰아세우고, 서인의 집권을 위해 윤휴를 비롯한 남인들을 거세할 음모를 수립합니다. 그 음모의 결과가 숙종 6년(1680)에 발생한 경신환국(庚申換局)입니다. 숙종 시기 자주 발생한 이른바 환국(換局)은 정권교체를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경신환국은 당시 남인 영의정이었던 허적을 비롯해 수많은 남인과 왕족, 윤휴까지 휘잡아 목숨을 빼앗은 정치적 참극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남인에 대한 음모의 주모자인 김석주의 처리를 둘러싸고 서인 세력은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으로 당을 달리하게 됩니다. 국가의 치욕을 씻고 양난(兩難) 이후 사회개혁을 꿈꾸던 윤휴는 기득권 강화에 골몰한 송시열의 모략에 굴복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북벌은 그렇게 결론이 납니다. 『주역·계사전』에 보면 덕박위존(德薄位尊)이라 했습니다. 도덕심은 없으면서 지위만 높다는 뜻으로, 인격과 능력을 먼저 갖추지도 않은 채 오직 자신의 출세를 위해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일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아마도 송시열 같은 자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합니다.

 

둘째,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드러난 송시열의 자비(自婢)

예송논쟁은 조선 역사에서 흔히 조선 조정의 한심한 당파싸움의 일화로 소개되곤 합니다. 식민사학자들이 특히 나서서 구중궁궐의 권력다툼으로 과대포장 합니다. 이 논쟁의 본질을 보지 않고, 그 논쟁의 시시콜콜한 궁중 암투만을 과장합니다. 2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에서 누가 죽었을 때, 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세세한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본질은 조선의 왕권을 자주국의 위상에 걸맞게 볼 것인가, 아니면 중국에 예속된 제후국 수준의 차원에서 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서인 세력은 인조반정 이후 조선 왕의 지위를 중국 명(明)나라의 제후국으로 천명했습니다. 조선의 왕이 제후 수준이라면, 명(明) 황제 앞에서 조선의 왕과 조선 왕의 신하는 품계의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신하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찾아볼 수 없는, 자주국의 위상 대신 서인들이 주무르는 사대(事大)의 신하국(臣下國)을 추구한 것입니다. 왕은 꼭두각시를 세워놓고 서인(노론) 세력이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음모입니다. 사대주의에 기대어 자신들의 배 속만을 채우겠다는 작태입니다. 반면에 남인 측이 주장했던 조선 국왕의 위상을 높이려는 태도는 당연히 자주국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조선 전기와 같은 중국과의 적절한 사대 관계를 유지한다는 입장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이 논쟁이 처음 벌어진 헌종 시기(1659)에는 서인이 승리했지만, 2차(1674)에서는 남인 측이 승리했습니다. 이 논쟁 과정에서 송시열은 당연히 국왕의 권위를 낮추는 방향으로 상복 착용 시기의 단축을 주장했고, 윤휴는 남인들과 함께 왕의 권위를 높이는 자세를 취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 논쟁 과정에서 윤휴와 송시열은 상대방의 사상적 참모습을 확인하고, 공존하기 힘든 적대세력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셋째, <중용(中庸)>의 해석을 둘러싼 대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조선의 집권 세력은 류성룡 등이 제시해 백성들의 큰 호응을 얻었던 개혁 대신 자신들의 기득권 강화를 택했습니다. 전쟁 중에 내걸었던 모든 약속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더 가중된 조세와 노역이 요구되었습니다. 특히 인조반정 이후 지식인들인 사대부에게는 정치학의 교과서라 할 <중용(中庸)>에 대한 사견(私見)이나 재해석이 일절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기득권세력은 사상적 통제를 통해 기득권 수호를 도모했습니다. 송시열(宋時烈)이 이끈 서인(노론) 세력에게 주자(朱子)의 <중용(中庸)> 해석에 대한 이견은 바로 체제에 도전하는 이단이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성리학은 이제 학문이 아닌, 이념이자 종교가 된 것입니다. 조선 전기, 이율곡과 이황 시대의 자유로운 성리학 논쟁 시기는 종말을 고하고 사상통제와 유일 이념으로 주자의 해석만이 강요되었습니다.

그러나 윤휴는 바로 그 주자의 <중용(中庸)>해석에 과감하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윤휴는 주자(朱子)가 기술한 중용의 최고 권위서로 꼽히는 <중용장구집주(中庸章句集註)>를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윤휴는 <중용>에 대한 지나친 형이상학적 해석을 비판하며 일상으로 끌어내리려고 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다루고 있는 경전을 굳이 복잡한 형이상학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의 격렬한 비난과 상소가 빗발쳤습니다. 조금이라도 체제에 저항하거나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가는 ‘빨갱이’로 몰아 처단하는 버릇이 바로 송시열 일당에 의해 자행되었습니다. 윤휴에 대한 마녀사냥은 때마침 불어 닥친 경신환국(1680)의 피바람 앞에 내몰렸고, 윤휴는 결국 사약을 받고 스러지게 됩니다. 송시열에게 윤휴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죽여야 할 사상범, 빨갱이였습니다. 윤휴를 죽여야 했던 이유를 송시열이 남긴 이 다음과 같은 말이 잘 보여줍니다.

“주자가 모든 이치를 밝혀놓았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소견을 내세워 억지를 부리니 진실로 사문난적(斯文亂賊)이다.”

윤휴는 북벌을 추진했고, 경제개혁을 주창했고, 주자의 해석에 도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서인 집권 세력에게는 눈엣가시였습니다. 송시열은 여러 번 윤휴를 종용하며 전향(?)을 회유했지만, 윤휴의 개혁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정적세력을 제거한 서인 세력은 일시적으로 남인에게 자리를 내주기는 하지만, 노론(老論)의 위세는 세도정치를 거치며 조선을 멸망으로 이끈 주역이 됩니다. 일제에 조선을 팔아넘겨 작위를 받은 자들의 87%가 노론이었고, 노론의 마지막 당수가 이완용이었습니다. 혹자는 윤휴를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모험주의자, 독선가로 매도하기도 합니다. 처세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윤휴는 자존(自尊)의 길에서 타협이나 권력의 단맛 보다는 어쩌면 <중용>이 남긴 군자의 길에 가장 가까이 가고자 분투한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흔히 조선 <노론 300년>을 논할 때, 그 시점은 인조반정(1923년) 이후 일제 강점기 노론의 후예들(국권피탈에 공을 세워 귀족 지위를 획득한 자들) 시기를 말합니다. 송시열은 노론의 우두머리로 무리를 이끌며 최고의 권세를 누렸으나, 그 역시 윤휴가 사망한지 불과 9년 후인 1689년(숙종 15년) 노론 세력이 일시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은 <기사환국>으로 사약을 받았습니다. 윤휴와 송시열, 둘 다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누가 역사의 승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윤휴와 송시열의 자존(自尊)과 자비(自婢)의 전쟁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식민사학과 뉴라이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은 또 다른 자비(自婢)의 역사관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5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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