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선택이었을까 ?

  • 이병권의 매국우파론 3부: 뉴라이트(매국우파)의 배신의 역사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혼탁하고 불의로 가득 차 있을 때, 그 시대를 바꾸고자 하는 선각자들은 무엇보다 미래의 비전을 찾고자 합니다. 대안이 있어야 희망을 꿈꾸고, 세력을 모으고,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려 말의 정도전이 새로운 국가를 꿈꾸며 그랬고, 국권이 상실될 시기, 전 재산을 털어 만주에 터전을 잡고 독립된 나라의 미래의 민주공화정국가를 꿈꾸고 싸웠던 이회영 선생 일가와 선조들이 그러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가 군사독재에 짓밟히고 민주주의가 질식했을 때, 그 시대를 고민했던 많은 지식인들 또한 새로운 사상적 등불을 밝히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데 분투했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 청춘 중 일부는 민족문제를 중심으로 주체사상에 호감을 갖고, 반외세 투쟁의 행동무기로 활용할 것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분투는 불과 13년(1999년)만에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도된 길로 접어듭니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오늘날까지 스스로의 잘못된 선택을 반추하거나 반성하지 않은 채, 과감히 ‘변절’의 화인을 훈장으로 여기며 과감히 이카루스의 후예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지금 ‘뉴라이트’라고 불립니다. 20여 년간 세도 많이 불렸습니다. 한 때 이들이 그토록 강조했던 동지애나 뜨거운 가슴은 이제 돈과 권력에 때한 뜨거운 욕구로만 보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어떤 선택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NL주사파의 뉴라이트의 거두였던 김영환과 <식민근대화론>의 창안자 안병직의 선택과정에서 그 일단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김영환의 배신과 변절 과정

앞선 제 칼럼에서도 이미 소개하였던 김영환(서울법대 82학번)은 1986년 <강철서신>이란 팜플렛을 대학가에 배포하며, 한국사회에 금기시 되어왔던 주체사상에 대한 관심과 ‘미제국주의’ 문제를 전면에 내건 장본인입니다. 김영환은 자신의 팜플렛에서 주체적 사상 제고와 미제국주의 타도 의지 못지않게 조직원들의 절제된 생활습관과 ‘품성론’을 애써 강조합니다, 이 품성론의 핵심이 조직과 동지에 대한 헌신과 동지애입니다. 그러나 정작 김영환의 선택과 삶의 모습은 그러해 보이지 않습니다.

첫째, 심진구와의 인연과 배신

김영환은 1985년 대학선배의 소개로, 당시 구로공단 삼립식품에서 근무하며, 노동운동을 하던 노동자 심진구를 만나게 됩니다. 심진구는 비록 고졸 출신이었지만, 고교시절부터 왕성한 독서와 사색을 통해 역사와 철학 등에 상당한 조예를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1985년 김영환은 자신의 대학동기 하영옥과 함께 심진구의 자취방에서 합숙하며 노동운동과 다양한 사회과학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이듬해인 1986년 봄, 김영환은 자신의 <강철서신> 4편을 대학가에 배포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 중 한 편인 <선진 노동자의 임무>라는 팜플렛은 심진구가 작성한 것을 김영환이 무단으로 도용한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심진구와 하영옥에게 큰 질책을 받고 자신은 사과했다고 하나, 심진구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1986년 11월 김영환은 부산에서 안기부에 체포되어 심문 과정에서 심진구를 지목하였고, 안기부는 심진구를 불법 구금한 채 두 달 넘게 혹독한 고문을 가합니다. 심진구는 결국 구속되어 3년여 수형생활을 하고 만기출소 하나, 이후 고문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2012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재심청구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심진구는 2014년 고문후유증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심진구는 여러 차례에 걸쳐 “김영환을 만난 것을 후회한다.”,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김영환이 심진구를 안기부의 고문에 의한 강압적 상황에서 불었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건과 무관한 심진구에 대해 방어할 기회는 충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안기부는 심진구를 김영환의 배후로 추정하여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고 합니다. 김영환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면 심진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김영환은 왜 심진구를 그리 선택하였을까 매우 궁금합니다.

둘째, 김영환의 전향

김영환은 1990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납니다. 그 이유는 알려지고 있지 않습니다. 김영환은 활동을 재개했고, 1991년 이후 2차례 북한에 밀입국했고, 김일성과 2차례 면담하고, 북한노동당에 입당합니다. 당시 돈으로 미화 4천불과 김일성으로부터 권총까지 선물로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김영환은 NL주사파의 사실상 수장 역할을 수행합니다. 1997년 당시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 중앙위원이었던 김영환은 돌연 당의 해체를 일방적으로 선언합니다. 이후 1999년 민혁당이 당국에 노출되자 중국으로 도피했다가 중국으로 긴급 파견된 <월간조선>과 인터뷰한 이후 안기부에 자진 출두합니다. 전향을 서약, 선언하고 불구속 입건됩니다. 아울러 자신이 이끌던 상당수의 조직원들을 설득해 동반 전향합니다. 이후 북한민주화운동과 반(反)주사파 운동에 매진하게 됩니다. 혹자는 김영환의 전향과 관련해 잘못된 길을 바로 잡는 것을 애 문제시 하냐고 항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아끼는 조직, 동지들과 함께 얼마나 충실히 자신들의 선택과 전략, 방향이 옳았는지, 세계의적 흐름을 잘못 읽거나 잘못된 전략을 선택하지는 않았는지, 얼마나 심도 깊은 논의를 한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조직과 동지에 대한 강철대오를 주창했던 그에게 과연 동지나 사상이 자신에게 어떤 가치와 대의(大意)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 통합진보당 해체에 앞장선 김영환

2015년 당시 국회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제명과 통합진보당 해산 문제로 매우 소란했습니다. 결국 이석기 의원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었고, 통합진보당은 헌법재판소에 의해 운명이 갈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때 김영환이 등장합니다. 헌법재판소 증인심문에 김영환은 검찰 즉 증인으로 출두하여, 이석기는 민족민주혁명당의 핵심 인물이었고, 통합진보당은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집단이라는 취지의 증언을 합니다. 판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증언이었습니다. 이로써 통합진보당은 해산되었고, 이 정당해산결정은 아직까지 그 정당성과 관련해 많은 논란을 낳고 있습니다. 김영환은 이 증언으로 스스로의 ‘전향’의 진정성을 확인받았지만, 이 선택으로 인해 순수하게 민족과 통일을 고민하던 모든 노력과 행위 자체가 반국가행위로 매도되었습니다. 북한과 통일운동을 매도하는 수구보수집권세력에 좋은 먹잇감이 된 것은 물론입니다. 김영환의 선택은 자신의 열망하던 조국통일의 길을 수구세력의 입맛에 맞게 요리해 준 것입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외눈박이 해석

안병직이 1985년 일본 유학을 통해 일본의 경제학자 ‘나카무라 시토루’로부터 전수받은 <중진자본주의론>은 1997년 안병직이 세운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토요타재단의 후원에 힘입어 발간된 두 권의 한국근대경제서와 함께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체계를 잡게 됩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요체는, 첫째, 애초부터 근대화(자본주의)적 맹야가 없었던 조선이 근대화 된 것은 일제가 식민지 시절 한국에 이식한 자본주의 덕분이며, 둘째, 이 자본주의적 토대를 바탕으로 해방 이후 한국의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1980년대 이후 한국경제의 비약적인 성장은 오로지 일본의 자본주의 이식 결과이니, 따라서 일제에 부역한 친일인사들이 선구자이며, 독립 운동가들은 테러리스트이고, 넷째, 강제징용이나 위안부는 모두 돈 벌기 위한 경제행위로 치부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뉴라이트(매국우파)>의 핵심 논리인 이러한 주장은 외눈박이 주장에 불과합니다.

근대화의 핵심인 자본주의적 개발은 동전의 앞뒤면.

박태균 선생의 지적과 같이 식민지 경영에서 흔히 쓰이는 개발이란 용어는 영어 ”Exploitation’은 ‘개발’이라는 긍정적 느낌의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수탈’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전 세계의 모든 제국주의가 그러하듯이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를 ‘착취’하기 위해 적당히 ‘개발’합니다, 다시 말해 근대화(자본주의)화 하는 것입니다. ‘착취’할 목적이 없이 근대화시켜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일제는 자신들이 필요한 만큼 도로를 깔고, 철도를 부설하고, 공장을 짓고 제도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일제는 단 한 번도 조선과 일본을 동격으로 가정한 바 없습니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일본 본국과 완전히 다른 조선총독부의 통치 아래에서 별도의 법으로 학대받고 식민 교육받았고, 차별적으로 재판받았으며, 별도의 화폐로 제한적 경제활동을 강요받았고, 동원되었습니다. 따라서 일제와 식민지 소선을 동등한 입장에서 내선일체를 앙망한 <식민지근대화론>은 그 자체가 일부러 한 눈은 감고 다른 눈으로만 세상을 보려는 괴물의 궤변입니다.

 

외눈박이로 세상보기의 위험성

새는 좌우의 날개로 허공을 가릅니다. 사람은 두 눈으로 세상을 균형 있고 멀고 가까움을 가늠합니다. 오로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조망하는 그 만큼 오도와 오역, 위험이 큽니다. 더 큰 문제는 한 쪽 눈으로만 보면서 둘 중의 하나만 선호할 때 그 위험은 몇 갑절 가중됩니다. 그러한 선택이 올바를 수 없습니다.

1980년대 중반, 김영환을 비롯한 NL주사파는 한국사회를 분석하는데 민족의 문제에만 골몰하다 보니,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모순과 심각함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나의 눈으로 세상을 분석하지 않고, 이미 누군가 지나간 시대에 내린 해석을 오늘날 일방적으로 차용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 동구권의 몰락을 목도하면서, 사회주의의 패배,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이분법에 사로 잡혀 지난 반세기 이상 서구 유럽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분석하며, 그 대안을 찾으려 노력했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무시했습니다. 또한 엘리트주의에 빠져있던 김영환 유는 말은 대중운동을 외쳤지만, 정작 자신들은 ‘지도이념’에 빠져 시민운동의 성숙과 발전을 고민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이들 전향 주사파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북한민주화운동에 골몰하다 보니, 자신들을 반겨줄 진영은 수구 우파 밖에 없었지만, 자신들의 주장만을 고집하다보니 결국 수구우파의 품에 파고들었습니다. 일단 기득권 수구우파의 온돌과 <사사카와재단> 같은 일본 극우자본의 유혹에 그들은 온전히 자신들의 영혼을 내주었습니다. 민주주의, 민족과 같은 ‘가치 중심적 사고’는 자본과 물신(物神)이 춤추는 ‘현실주의적 기회주의’로 대체되었습니다. 외눈박이 세계관, 흑백논리만을 선택지의 전부로 이해하는 이들에게 그게 애국이던, 매국이던, 문제가 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애국의 열정에서 출발했지만, 한 쪽 눈 감고 악수(惡手)만을 거듭한 그 결과, 그들의 오늘을 돌아보며 문득 묻고 싶어집니다.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습니까?

 

8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 <strike>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