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삿날!
– 백결
제사 준비 하러…
어머니는 어제 낮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공사다망…
술 냄새 밖으로 나갈 까봐…
어머니는 어제 밤 안방 갔다 부엌 갔다.
안절부절…
가양주. 집에서 담그는 술! 조상을 숭배하는 우리의 정서상 제삿날 정성되게 올리는 술은 그 집에서 대대로 내려온 그 집만의 비법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정서상 반(反) 하는 법이 만들어진 게 바로 주세법이라 할 수 있다.
처음 주세법이 만들어진 것은 을사조약 이후 1909년(융희 3년). 그해 2월 법률 제3호로서 주세법이 발표되었다. 술의 양조를 자가용?판매용을 가리지 않고 무제한 면허제로 하여 해마다 12월까지 다음 해에 양조할 생산량을 소속 세무서에 신고하면 그 생산량에 따라 각종별로 과세를 했다. 19세기 말 다양한 술을 만들던 부흥기를 완전히 막는 주세법 제정 당시 제조장 수는 155,832장(場)이나 되었다고 한다.
주세법 그 말 그대로, 술에 세금을 매기는 법이다. 심지어 그때에는 집에서 만들어도 세금을 내야 하는 법!
1910년 우리의 주권은 완전히 일본에 빼앗기고, 1916년에는 종래의 주세법을 고쳐서 ‘주세령(酒稅令)’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자가용 술의 제조를 무제한 허가하고 있었던 것을 ‘제한면허제’로 고치는 동시에 자가용 술의 과세율을 영업용 술보다 높여서 업자를 보호하였다. 주세령의 강제집행은 곧 전통주의 말살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때부터 수 백종에 달했던 전통주가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각 지방과 집안마다의 가양주는 밀주형태로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되는데, 이때 일제는 밀주 제조에 대한 단속 강화와 함께 모든 주류를 약주, 탁주, 소주로 획일화?규격화 시켰다.
특히 순곡 청주류와 가향주류, 약용 약주류를 약주류로 묶고, 일본술을 청주류로 분리함으로써, 조선주로서의 청주류는 사라지고 약주란 명칭을 사용하게 되면서 제주에 일본 술인 정종(청주, 상표이름)을 사다 쓰는 웃지 못할 풍속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일부에서는 술의 높임말로 약주라고 이른데서 “약주 대접한다”, “약주 한 잔 드시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이후 모든 술을 일컬어
‘약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행간의 의미인 집에서 먹는 술의 제조자는 그 술을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판매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면허의 상속을 일체 금지시켰다. 반면에 판매용 술의 제조자는 그 영업의 상속이 인정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술의 제조자일까? 일제에 찬성하며, 그들의 주장과 이익에 반하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아무튼 1917년부터는 주류제조업의 정비가 시작되면서 각 고을마다 주류제조업자를 새로 선정 배정하였다. 그 후 주세령은 1919, 1920, 1922, 1927, 1934년의 5차에 거쳐 개정되고, 주세에 의한 착취가 지능화되고 자가용 술의 면허제도 극도로 억제하여 1932년에는 자가용 술 면허자가 단 1명만 남았고 1934년에는 그것마저 완전히 없어졌다. 이것은 집에서 빚는 모든 술이 불법 밀주가 되어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든 이 기간은 36년으로 1세대를 뛰어넘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광복 이후 우리 정부의 주세정책이었다. 그래도 조상님께 드리는 제삿술이라 밀주 형태로 유지된 술 그리고 판매용 약주를 빚는 업자들이 있어 조선 약주는 명맥을 간신히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에 따라 주조업자가 비대해 가고 술의 품질이 규격화됨으로써 우리의 전통 명주는 완전히 맥이 끊기게 되었다.
?1965년 양곡관리법 그리고, 천상병
– 천상병
술 없이는 나의 생을 생각 못한다.
이제 막걸리 왕대포 집에서
한잔 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
젊은 날에는 취하게 마셨지만
오십이 된 지금에는
마시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아내는 이 한잔씩에도 불만이지만
마시는 것이 이렇게 좋을 줄을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천상병. 유신시대의 압제를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 아이콘이 아닐까? 그의 인생을 보자.
1930년 1월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여 경상남도 마산(現 창원시)에서 자랐다가 마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중학생 시절인 1949년 죽순(竹筍) 11집, 공상(空想)을 통해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에 입학했다가 4학년 당시 중퇴하였고 1966년 독일 동(東)베를린 공작단 사건, 일명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는데 이 때를 계기로 심신(心身)이 멍들게 되는 후유증을 앓기도 하였다. 이 사건 때문에 그의 인생은 정말 비참하게 되었다.
1970년에는 무연고자로 오해를 받게 되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하였다가 1972년 친구의 여동생인 목순옥과 결혼하였으며 1979년 시집 ‘주막에서’, 1984년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1991년 ‘요놈 요놈 요 이쁜놈’ 등의 시집을 발표하며 활동하였다가 1993년 4월 28일 간(肝)경화증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참 슬픈 인생이다. 그는 신이 선택한 불행한 시인이 아니다. 그는 정권이 만든 암흑기의 불행한 시인이다.
전통주 역시 이때가 가장 암흑기라 할 수 있다. 해방 후일제시대 주세법을 모태로 술에 관한 제도와 정책이 결정됐다.
1965년 양곡관리법! 곡물로 술을 빚지 못하게 하는 법! 쌀 막걸리는 밀 막걸리로 대체됐지만 찹쌀이나 쌀로 빚던 약주나 증류 소주는 질식사 했다. 그래도, 정권에 의해 국가를 대표할 전통주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서 금복주에서 만드는 경주법주는 간신히 인정을 받았지만, 정작 경주법주를 만드는 법을 전해준 경주의 명가들은 제조를 금지 당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통주들과 술도가가 사라졌다.
그러다가 88 올림픽을 맞이하면서 전통주를 조금이라도 인정해야 할 필요가 생기면서, 이 때까지는 밀주의 형태로 이어지던 민속주 가운데 딱 8개를 정해서 판매를 허용했다. 이것이 소위 ‘국가지정 8대 민속주’이다. 1995년이 되어서야 판매를 하지 않는다면 제조는 가능하게 허락이 된다.
이 기간을 거치며 희석식 소주가 술의 주류를 차지했고, 먹고 죽자는 식의 술 문화로 왜곡되어버렸다. 대중적인 막걸리와 청주도 일본식 입국의 사용이 잦아져 그 정체성을 대부분 상실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비합리적인 주세 등으로 인해 한국의 전통주는 조선 후기에 비해 매우 쇠퇴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픔을 알기에 여러 사람들은 전통주의 부흥을 꿈꾸며 노력을 기울인다.
[코리언저널 이희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