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권의 매국우파론 2부 : 안병직과 <낙성대 경제연구소>
많은 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일본은 조선 침략 시기였던 1890년대부터 조선의 지식인들을 회유하고 매수하는 데 탁월한 능력과 성과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당초 친미파였던 이완용이 친러파를 거쳐 최종적으로 친일파로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엄청난 ‘댓가’가 지불되었습니다. 일진회를 이끌었던 송병준은 한술 더 떠 경술국치 직전, 일본에 자신이 나서서 반드시 병합을 성사시키겠으니, 대가로 당시 돈으로 1억 엔(현재 가치 약 7조 원)을 요구했고, 이 엄청난 대가는 분할되어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일제하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는 데 앞장선 <조선사편수회>의 일원이었던 이병도나 신석호 역시 일본 유학 시절 큰 지원을 받았고, 해방 후 <반민족행위처벌특별위원회>에 기소되었으나 이승만의 방해로 살아남아,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한국 역사학계를 이끌게 됩니다. 이들은 일본의 식민 역사학을 이끌었으며, 오늘날에도 그들의 후예들이 고대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일본이 애지중지하는 임나일본부설을 틈만 나면 재생산하며, 김부식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근거 없이 무시하려 합니다. 이는 모두 일제하 일본으로부터 물려받은 식민사학의 잔재들입니다.
■ 지식인 포섭의 달인 일본
일제하, 조선의 지식인 회유에 일가견이 있었던 일본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부터 한국에 다시 상륙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일 민족주의가 강했던 탓에, 당시 일본은 강력한 경제적 지원을 통해 한국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을 회유하며 우호적인 군세를 확보하는 데 나섭니다. 한국 지식인들을 회유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일본 내 유학을 대거 유치하거나, 일본 연수 프로그램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입니다. 이 지원금에는 직접적인 대가가 요구되지 않지만, 횟수가 거듭될수록 받는 이는 습관이 되고, 제공자에게 뭔가 보답하고자 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2단계가 시작됩니다. 우호적인 분위기 형성에 앞장서게 하는 것, 한 발 더 나아가면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일본은 1970년대 급속히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쿨 재팬(Cool Japan-매력적인 일본)’ 운동을 민관 합동으로 전개했습니다. Japan Foundation을 통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일본 문화를 전파하고, 일본어를 보급하며, 유학생을 대거 유치했습니다. 특히 한국과 대만 같은 인접국에 대해서는 파격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일본에 다녀온 다수의 지식인들이 어느덧 자연스럽게 ‘선진 일본’을 찬양하는 전도사가 되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윤기중 교수(윤석열 대통령 부친)는 한국 내 일본 문부성 장학생 1호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본 유학 열풍은 미국 유학이 대세를 이루는 1990년대에 이르러 후퇴하기 시작했고, 1986년 일본이 프라자 합의를 통해 경제 쇠퇴의 늪에 빠지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일본의 ‘국책사업’이었습니다.
■ 안병직, 일본의 <중진자본론> 품에 안기다
1985년 일본 도쿄대에 잠시 유학길에 오른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였던 안병직은 여러모로 일본의 한국 지식인 포섭 프로그램에 최적의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안병직은 서울대 대학원 시절부터 진보적 지식인의 길을 걸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당시 접하기 쉽지 않았던 마르크스와 모택동의 저서를 탐독하며, 암울한 경제 후진국의 현실을 개찬하고 동료, 선후배들과 깊은 토론을 나누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울대 60~70년대 운동권의 주요 이론가로 통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김정남, 김근태와 가깝게 지냈고, 통혁당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김수행, 신영복과는 호형호제였습니다. 같은 과 2년 후배였던 박현채와는 비록 1980년대 중반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라이벌 관계였으나, 박현채 선생이 병환으로 타계할 때까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김문수를 노동운동가로 이끈 것도 안병직이었습니다.
그런 안병직이 1984년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후배 박현채는 물론, 다수의 후배 논객들에게 형편없이 반박당하면서 자신의 창작물이었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은 사실상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입장에서도 논리적으로 통박당하고, 몰락할 것이라 예견했던 한국 경제가 계속 발전하면서 현실적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이 무렵, 안병직은 일본의 <역사평론>에 실린 <중진자본주의의 길>이란 논문을 발견합니다.
일본 교토대 경제학자 나카무라 시토루는 안병직에게 도피처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일본에 건너가면서 안병직은 이미 마르크스 경제학자가 아닌 신보수주의 경제학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후진국도 자체적 자본주의 성장을 통해 중진국 이상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중진자본주의의 길’은 자신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의 치명적 결함을 만회할 수 있는 논리적 완결성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안병직은 1985년~1987년 도쿄대에 머물면서, 기존에 자신이 주장했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버리고 <중진자본주의론>을 적극 수용합니다. 이 시기 그는 일본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을 받으며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초석을 다지게 됩니다.
■ 안병직이 물꼬를 튼 ‘극우 일본 꼬리표’가 붙은 지원금
1987년 귀국한 안병직은 곧바로 성균관대 이대근 교수와 함께 <낙성대경제연구소>를 만들어 ‘실증’에 기초한 한국 경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활동에 돌입합니다. 여기서 ‘실증’이란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은 독일로부터 실증주의 역사학을 받아들여 유난히 ‘실증’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 ‘실증’이란, 철저한 객관성을 유지하고 객관적인 사료에 근거해야 한다는 명분과는 달리, 실상은 자신들이 인정하고 유효하다고 판단한 사료나 사건만을 인정하고, 자신들만이 인정한 ‘사실’로 이루어진 작품을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일본 총독부에서 만든 자료, 2차, 3차 교차 검증이나 다른 시각의 개입 여지를 봉쇄한 자신들만의 자료와 숫자만으로 이루어진 것을 그들은 ‘실증’으로 간주합니다. <중진자본주의론>에서 강조하는 일제하 조선의 자본주의화 역시 그 자본주의의 목적, 과정, 보상 등이 생략된 채 단지 도로, 철도, 공장, 노동자, 학교 수 등의 증가만을 놓고 이를 자본주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안병직은 <토요타재단>의 막대한 후원을 받아 14명의 한·일 학자들이 참여한 기획 저작들을 발간합니다. <근대조선의 경제연구(1989)>, 그리고 <근대조선 수리조합 연구(1992)> 등입니다. 이후 이 책의 내용들은 안병직의 제자 이영훈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뉴라이트>의 주요 이념적 근거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안병직과 이영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조선은 스스로 자본주의화(근대화)할 능력이 없었지만, 일본
식민지 시기 자본주의적 초석이 다져지면서 이후 자본주의화가 가능해졌다. 오늘날 한국 경제가 크게 성장한 것은 일본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으며, 일제하에서 이 자본주의화에 협력한 자들(부역자)이 선각자들이다.’ 이것이 안병직과 그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중진자본주의론’입니다.
안병직과 <낙성대경제연구소>의 뒷배경이 일본 극우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외에도 일본 A급 전범이 세운 <사사카와재단>의 거금이 수시로 한국 내 여러 대학과 지식인들에게 제공되었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놀랍게도 역사학자 한홍구가 <토요타재단>으로부터 거액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저명한 정치외교학자 문정인 교수는 <사사카와재단>이 연세대학교에 100억 원의 기금으로 설립한 <아시아연구기구>의 이사장을 연세대 류석춘 교수에 이어 맡았다고 합니다. 그 외에 얼마나 많은 한국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직간접적으로 일본 극우의 꼬리표가 붙은 지원금을 받고, 결국 그들의 부역자가 되었는지 추론할 뿐입니다.
<사사카와재단>은 일본 전범이었던 사사카와 료이치의 이름을 딴 재단으로, 각종 투기성 사업으로 조성되었으며, 야쿠자 자금으로 의심받기도 합니다. 재단의 주인공인 사사카와 료이치는 전범 재판으로 3년간 투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표적인 파시스트로 평가됩니다. 그는 1974년 미국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파시스트”라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프랑스에서는 설립 자체가 불허된, 매우 극우적이고 위험한 재단입니다. 이 재단의 수백억 원이 한국의 주요 대학에 뿌려졌다는 것은 상식에 속합니다. 그중 100억 원의 연구지원금이 1990년대 초 연세대학교에 지원되었고, 그 창구가 윤기중(윤석열의 부친) 교수였다는 소문도 무성합니다. 이렇듯 돈으로 매수된 다수의 지식인들은 점차 돈을 준 자들의 논리를 재생산하고 옹호하는 데 앞장서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지점부터는 자신들의 행동을 떼지어 ‘애국’이라고 우깁니다.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저 역시 최근에서야 저들의 실체와 논리, 그 배경과 과정을 고스란히 알게 되었으니까요. 많은 시민들이 그러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 정체를 온전히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 밀정들을 어떻게 역사의 재판정 앞에 세울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뉴라이트’는 매국 우파 집단이자 밀정 집단입니다. 그들은 헌법과 앞으로 제정해야 할 법률로 규제하고, 그들의 반국가·반민족 행위를 독일의 <연방헌법수호청>이 극단주의 세력을 제어하듯 다루어야 합니다. 저는 그 날이 멀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이 병 권 (인문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