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종의 한자 그물로 중국어 잡기?2]?
다가오는 무엇인가를 비켜선다는 뜻을 담은 한자가 피(避), 어려움을 뜻하는 글자가 난(難)이다. 그래서 내게 닥치는 위험을 피해 어느 한 곳으로 도주하는 게 피난(避難)이다. 우리식 한자 씀씀이에서는 별로 구별을 짓지 않지만, 중국은 이 ‘난’이라는 글자를 소리에 맞춰 함께 내는 높낮이 표시용 성조(聲調)로 차별화해 뜻을 가른다.
흔히 ‘어려움’의 새김으로 이 ‘난’이라는 글자를 알고 있지만, 여기에는 전쟁이나 혹심한 가뭄 등에 의해 발생하는 재난(災難)의 의미도 담겨 있다. 단순한 어려움을 넘어서 삶과 죽음을 가르는 큰 위기를 표시할 때 이 ‘난’이라는 글자를 쓴다. 따라서 ‘피난’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뜻은 ‘전쟁과 대형 재난 등을 피함’이다.
요즘 ‘조세(租稅) 피난처’가 유행이다. 한국의 일부 대기업을 포함해 250여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즐겨 사용했다고 알려졌다. ‘조세 피난처’는 영어로 ‘tax haven’이다. 안식처, 또는 피난처라는 게 사전식 번역이다. 그런 번역어와는 달리 이곳은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그런 곳에 ‘조세 피난’이라는 말을 쓴다면 영락없는 언어 인플레이션이다. 과장도 그런 과장이 없을 뿐 아니라 보는 각도를 달리해 세금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을 정당화시켜주는 구석이 있다. 이곳을 즐겨 사용한 기업인들이나 돈 많은 한국의 부자들이 마치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몰려든 곳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에 속한 국민으로서 이행해야 할 신성한 납세의 의무를 져버린 사람들이다. 따라서 시쳇말로 ‘먹튀’에 해당하는 인물들일 뿐이다. 그들에게 ‘가혹한 재난을 피한다’는 뜻의 ‘피난’이라는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조세 피난처’의 이름을 바꾸자.
의무를 져버리고 튀는 ‘도피(逃避)’라는 단어가 더 이들에게 어울리므로, 우리는 그 이름을 ‘조세 도피처’로 해야 옳겠다. 그 사람들 역시 ‘피난민(避難民)’이 아니라, 납세의 의무를 회피하려 도망친 ‘조세 도피민(逃避民)’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한자를 점차 잊어가는 세태는 마침내 이들이 향한 곳을 ‘조세 피난처’로 부르는 과오를 불렀다. 이슬비에 옷 젖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언어의 숨은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오남용을 하다가는 어느덧 세금을 탈루하고서도 대로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불쌍한 피난민과 혼동하는 결과를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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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풀이]
避(피할 피).
難(어려울 난):? 전쟁과 천연재해 등이 빚은 고난(苦難)을 일컫기도 한다.
租(세금 조):?원래의 뜻은 논과 밭 등 경작지에 매기는 세금. 2차적으로는 돈을 내고 무엇인가를 빌리는 일. 고대 중국에서는 이 글자가 곡물을 거둬 식량이 없는 사람을 돕는다는 뜻도 포함했다고 한다.
稅(세금 세):?밭 등에 매기는 세금. 앞의 租와 거의 같다. 세금 형식으로 거둬들인 곡물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租와는 조금 다르다는 해석도 있다.
逃(도망할 도): 붙잡히지 않기 위해 빨리 뛰는 동작을 일컫는다. 도망(逃亡)이라고 적으면 죽지 않기 위해 달아나는 행위다. 도피(逃避)는 직접적으로 ‘달아나다’의 뜻이다.
災(재앙 재): 원래는 큰 불을 일컫는다. 재앙(災殃)은 그로 인해 빚은 피해. 화(禍)와 해(害)로움이 한꺼번에 닥치는 경우다. 보통은 홍수와 가뭄 등으로 빚어지는 천연재해(天然災害)를 말한다. 그로써 빚어지는 고난이 곧 재난(災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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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피난’에 해당하는 말
?反?p?o f?n: ‘?(포)’라는 글자는 한국에서 잘 쓰지 않으나, 중국어에서는 ‘달린다’는 뜻으로 아주 많이 활용하는 글자다. 뒤의 ‘반(反)’은 ‘반대’의 뜻으로 한국에서도 널리 활용하는 글자지만, 여기서는 뜻이 다소 다르다. ‘정상적인 상태’를 뜻하는 ‘정(正)’과 반대의 상황을 의미한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결국 전쟁이나 참혹한 재난이 빚어져 사람이 곧 죽음에 처할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라는 얘기다. 그런 상황으로부터 달아난다는 의미가 곧 중국어 단어인 ‘?反’이다.
逃反?tao f?n: 위의 단어와 같은 뜻이다. 즉, 전란이나 대형 재난에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삶의 터전 등을 옮기는 일이다. ‘피난’에 조응하는 말이다.
避難?bi nan: 우리의 용례와 거의 같이 쓰는 단어다. 그러나 자주 쓰지 않는다. 피난처(避難處) 등 구체적인 이름에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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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과 관련이 있는 성어
?沛流??di?n pei liu li: 번자체로는 顚沛流離. 우리 식으로는 앞 글자를 顚(전)으로 읽는다. ‘뒤집어지다’의 뜻이다. 沛는 한국어로 ‘패’의 발음이다. 물이 크게 쏟아지는 모양을 일컫는다. 큰 비가 내리는 경우에도 쓴다. 여기에서는 ‘넘어지다’의 뜻이다. 따라서 ?沛는 뒤집어지고 넘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流離(유리)는 흩어지는 모양에 대한 형용이다. 따라서 이 성어는 ‘뒤집어지거나 넘어지며 여기 저기 흩어져 헤어진다’의 의미. 곧 가족이나 촌락 구성원들이 거처를 떠나 여기저기 떠도는, 피난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
背井???bei j?ng li xi?ng: 번자체로는 背井離鄕이다. 직접적인 번역으로는 ‘우물을 뒤로 한 채 고향을 떠남’이다. 우물은 곧 수원(水源)을 의미하고, 사람은 물을 떠나 살 수 없으므로, 결국 이 단어는 ‘사람 사는 곳’을 일컫는다. 사람이 함께 모여 사는 곳, 즉 사회(社會)을 일컬을 때 ‘시정(市井)’이라고 적는 이유다. 背는 사람 몸의 등을 말하는데, 동사로 쓰일 때는 ‘뒤로 한다’다. 떠날 리(離)에 고향 향(鄕)을 붙이면, ‘고향을 떠남’이다. 전란 등의 재난을 맞아 고향의 우물, 즉 살던 곳을 뒤로 한 채 떠나는 게 背井??이다.
유광종 책밭 대표는 기자 생활 22년의 전(前) 언론인이다. 중앙일보 사회부를 비롯해 국제와 산업, 문화, 정치 등 다양한 부문을 거쳤다. 주력 분야는 ‘중국’이다. 대학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뒤 홍콩에서 중국 고대 문자학을 연구했다. 대만의 타이베이, 중국 베이징 특파원을 역임해 중국 권역에서 생활한 기간은 모두 12년이다. 중앙일보 인기 칼럼 ‘분수대’를 3년 2개월 집필했고, ‘한자로 보는 세상’도 1년 동안 썼다. [연암 박지원에게 중국을 답하다] [중국은 어떻게 모략의 나라가 되었나] [장강의 뒷물결] 등 중국 관련 저서 3권을 냈다.